가루의 시작

우리나라에서 밀은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상류층만이 맛볼 수 있는 귀한 곡물이었다. 개항 이후 함경도 등 벼농사가 어려운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밀 재배가 시작되고 이와 함께 외국산 밀이 수입되면서 일반 대중들도 쉽사리 밀가루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밀가루의 수요가 증가하자 1918년 진남포에 밀의 가공을 위한 만주제분공장이 설립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제분 공장은 전국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1948

1949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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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대한제분과 밀가루

광복과 함께 이어진 6.25전쟁은 온 국민을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게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 우리 정부는 미국과 <공법 480호>의 협정을 체결하고 밀, 설탕, 면화 등의 원조 물품을 공급받으면서 소위 ‘삼백산업’이라고 하는 제당, 제분, 면방직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원조하는 원맥을 가공하기 위해 제분공장이 재건되었고 그 결과 밀가루가 싼값에 공급되어 사람들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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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분과 인천

1950년 시작된 6.25 전쟁으로 농토와 산업시설은 폐허가 되고, 굶주리는 국민은 늘어갔다. 그해 가을 유엔은 전쟁의 피해를 겪고 있던 대한민국의 재건을 위해 경제 분야의 원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구호물품이라는 이름으로 식량과 곡물 원조가 활발히 추진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양을 차지했던 것이 ‘밀’이다. 원조되는 밀의 원맥을 가공하여 ‘밀가루’로 만들기 위한 시설이 필요했고, 마침 인천에는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제분 공장이 방치되고 있었다. 이 공장의 서쪽은 인천항의 부두와 맞닿아 있었고, 동쪽은 인천역이 자리 잡고 있어 입지 면에서는 최적의 장소였다. 수입되는 원맥을 그대로 공장으로 옮겨 가공하고, 생산되는 밀가루 제품을 철도로 운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북한에서 전쟁을 피해 내려 온 피난민들이 인천으로 모여들었기에 노동력 또한 풍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2년 12월 25일 인천역 서쪽 방치되고 있던 제분 공장 건물을 활용하여 대한제분이 설립되었다.

1960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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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그리고
‘즐거운 분식’

광복과 함께 이어진 6.25전쟁은 온 국민을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게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 우리 정부는 미국과 <공법 480호>의 협정을 체결하고 밀, 설탕, 면화 등의 원조 물품을 공급받으면서 소위 ‘삼백산업’이라고 하는 제당, 제분, 면방직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원조하는 원맥을 가공하기 위해 제분공장이 재건되었고 그 결과 밀가루가 싼값에 공급되어 사람들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1980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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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인천,
곰표가 태어나다.

‘곰표’는 1952년 인천에서 태어난 대한제분 밀가루의 브랜드이자 마스코트다. 밀가루하면 곰표, 곰표하면 밀가루라는 등식을 낳을 정도로 ‘대한제분’이라는 기업 이름보다 ‘곰표’라는 브랜드가 우리에게는 더욱 친숙하다. 북극곰의 뽀얗고 하얀 느낌이 밀가루와 닮았고, 강인하면서도 끈기 있는 모습, 익살스럽고 귀여운 이미지가 대한제분의 밀가루를 상징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 북극곰을 마스코트로 채택하였다고 한다.

2000

2010